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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차가운 아름다움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 최두석,「성에꽃」 새벽에 도로를 달리는 시내버스에서 시인은 차창을 수놓은 “찬란한 치장”을 본다. 버스 창에 그림이라도 그린 것일까? “엄동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이라는 시구가 곧바로 뒤를 따른다. 최두석은 성에에서 꽃을 보고 있다. 성에는 무생물이고 꽃은 생물이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서 시인은 생명은 본다. 차가운 성에에서 따뜻한 꽃을 느낀다. 성에는 어떻게 꽃이 되었을까? 시인은 우선 어제 이 버스에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을 호명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권력은 없을 게고 돈도 없을 게다. 그런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뱉은 “입김과 숨결”에 시인은 주목한다. 입김과 숨결은 따뜻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따뜻한 숨결을 버스에서 내쉰다. 시간이 흘러 텅 빈 버스에 남아 있던 그 입김과 숨결의 흔적들이 간밤에 만나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성에꽃이다. 시인은 겨울에 핀 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이 엄동설한에 꽃이 피다니! 늦겨울에 피는 매화보다 더 일찍 꽃을 피운 성에꽃을 보며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한 환희를 느낀다.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시인은 꽃 이파리 하나하나를 세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세심하게 그려진 그림과 같다. 차가운 게 저리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고 시인은 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가운 아름다움은 이성으로 느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감각이다. 성에(꽃)는 실제로는 차갑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에에 꽃이 내뿜는 숨결이 덧붙는 순간 성에꽃은 그 어느 꽃보다도 따뜻한 대상으로 승화된다. 차가움 속에 따뜻함을 숨기고 있다. 아름다움은 이렇게 모순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성에꽃은 모순을 담은 대상이어서 이토록 아름다운 것일까 시인이 성에꽃의 미학에 심취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성에꽃에서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을 보고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을 본다. 성에꽃은 말 그대로 살아 있다. 사람들이 내뱉은 한숨이 얽히고설켜 이룬 꽃이 아닌가. 시인은 성에꽃이 핀 창가에 이마를 댄다. 차가운 기운이 머리로 몰린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불덩어리들이 씻겨나가는 느낌이 든다. 창문으로 손을 뻗어 시인은 성에꽃 한 잎을 지운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이 보인다.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무엇일까? 무엇이 시인의 얼굴을 이리도 푸석하게 만들었을까?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은 친구가 있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는 “지금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가 되었다. 면회가 금지되었다고? 친구가 감옥에 있다는 것일까? 감옥에 있는 친구를 떠올리며 시인은 성에꽃을 시 세계로 불러낸 것일까 친구가 감옥에 들어간 이유는 ‘성에꽃’이라는 대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겨울에 꽃을 피운 성에꽃이다. 그만한 정열을 내뿜는 존재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최두석 시인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 벌어진 시대를 살아왔다. 감옥에 있는 친구는 민주화 운동의 길을 더불어 걸었던 동지일 것이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고, 시인은 감옥 밖에 있다. 안과 밖으로 떨어져 있지만 시인은 밖에서도 감옥을 느낀다. 친구를 감옥에 가둔 시대다. 권력의 폭압에 억눌려 푸석해진 얼굴로 시인은 쓸쓸하게 일상을 보낸다. 친구를 만나고 싶지만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를 만날 방법은 전혀 없다. 낙심한 채 버스를 탄다. 한겨울 추위에 몸은 이미 얼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버스 안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서민들이 내뱉는 입김과 숨결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성에꽃은 홀로 핀 꽃이 아니다. 성에꽃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불어 피워낸 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입김과 숨결을 내뱉은 결과로 성에꽃이 탄생한다. 시대는 다를지라도, 촛불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덥든, 춥든 한자리에 모여 열정적인 소리를 내뱉던 이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시대는 변했다.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가 있던 시절을 건너뛰고 우리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청껏 광장에서 소리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 세상은 그냥 이루어진 걸까? 아니다.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와 그 친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그나마 예전보다 나은 사회를 살고 있다. 그들이 오랫동안 해온 일을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한다. 성에꽃은 어느 순간 차가운 성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아름다운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뱉은 입김과 숨결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 이 시를 읽는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성에꽃 은 현실에 좀더 가까이, 좀더 깊이 파고들면서도 감성과 지성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 그 균형은 현실을, 정황과 함께 전형적으로 묘사해내는 저자의 시정신에서 획득되는데, 그런 그의 시는 날카로운 쐐기처럼 현실의 거짓되고 모순된 틈에 정밀하고 꼼꼼하게 박혀든다.
Ⅰ
샘터에서 / 성에꽃 / 만남에 대하여 / 눈 길 / 담양장 / 추석 성묘길에 / 산 길 / 안양천 / 안양천 메뚜기 / 다시 한강을 건너며 / 귀 향 / 강아지풀 / 무좀과 곰팡이
Ⅱ
파리티온 / 영산포 고모 / 연봉이 아재 / 유촌댁 / 누룩바위 / 옥수수 / 고순봉 / 김영천씨 / 빈 집 / 지하실 아주머니 / 김기섭 / 귀 가 / 어떤 문상
Ⅲ
달팽이 / 전길수씨 / 오 리 / 한재영 / 고창득 / 인천 자유공원에서 / 타 잔 / 미국병 / 동두천 민들레 / 심봉사 / 한장수 / 농 섬 / 낙지와 뻘밭 / 전만규 / 시목국민학교 / 교과서와 휴전선 / 여우고개
Ⅳ
고슴도치 / 지리산 찔레꽃 / 무등산과 삼인산 / 매화나무 앞에서 / 고인돌 / 채석강 / 전태일 / 서호빈 / 권인숙 / 항 심 / 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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